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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힘들었다. 하루 꼬박 전투로 보내던 시간이 비어버리자, 자연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탈출의 기쁨 이후, 코퍼스들의 마지막 숨 하나하나에 악몽의 조각을 담아 흘려보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악몽들이 다시 떠올랐다.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목을 죄는 것처럼 아팠다. 할 수만 있다면,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소처럼 다시 의식 밖으로 밀어냈다. 그러고 나면 생각은 계속 워프레임으로 돌아왔다.
몇번이나 불러내려 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닿는 것을 느꼈는데, 대체 무슨 일인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워프레임의 문제인지, 오퍼레이터인 자신의 문제인지, 혹은 그 외의 문제인지 몰랐다. 원인이 무엇일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생각에 잠겼다.
두 개의 전장. 로터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텐노가 아닌 적들과 싸우는 전투가 아닌, 내면과의 전투. 아마도 이것이 처음으로 겪는 그 두번째의 전투일 것이다.
가늘고 위태롭게 흔들리던 흐름과 거기서 쏟아져나온 이미지들. 조금씩 모양이 잡히며 손에 잡힐듯 했다. 분명히 그것은 워프레임이 남긴 힌트였고, 그것을 풀어야만 했다. 바닥에 쓰러진 워프레임을 내려다보았다. 고된 실험 끝에 부서지고 내부가 드러난 모습은 말 그대로 지울 수 없는 실험의 흔적이었다. 그래서, 워프레임과 연결되었을 때 항상 어딘가에 비치는 모습은 절대 보지 않았었다. 이렇게 천천히, 흔적을 되짚어 보는건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흔적 하나하나에 받았던 실험들이 떠올랐다. 그 때의 감정들이 떠올랐다. 분노, 슬픔, 그리고 고통 속에 혼자 남은 외로움. 오로지 코퍼스만이 칼날처럼 자신을 베어내던 그 때,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왜 벗어날 수 없는지, 왜.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지.
억울하고, 외로웠다. 세상에 나의 편 하나 없이 혼자 남은 그 어둡고 차가운 구렁텅이에 다시 떨어지는 듯 했다. 이젠 너무나도 커져버린 감정의 덩어리는 의식의 한 구석으로 밀어두기는 커녕 오히려 몸을 채우고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눈 앞의 워프레임에게 감정이 쏠렸다.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게 해주던 세계와의 매개체에게 버림받고 무력하게 남아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린게 아닌지.
볼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느끼자마자 안에서부터 덩어리가 터져나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울고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두 손바닥을 모아 고개를 파묻었다.
미동도 않고 쓰러져있던 워프레임이 움찔거렸다. 몸을 일으킨 워프레임은 무릎으로 조금씩 기어와 소매틱 링크를 붙들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차가운 무기질의 몸에서 이상하게도 온기가 느껴졌다. 느릿하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은 서툴렀다. 로터스의 다정하고 포근한 손길과는 달랐지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느새 눈물은 멈췄다. 조금 진정이 되자 고개를 들고 워프레임을 보았다. 실험의 흔적이 아프게 남은 얼굴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험으로 아팠던 건 자신뿐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실험으로 받은 고통이 아물기도 전에 자신의 부름에 응답하느라 무리를 해버린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탈출한 후에 이렇게 울어본 것도 처음이고, 누군가 달래준 것은 실험 때를 통틀어서도 처음이었다. 어쩌면 실험때도 그녀는 나를 위로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그곳에 있었던 건 나와 그녀 뿐이었으므로.
다시 연결을 시도해보았다. 연결은 안정적으로 성공했다. 나는 나의 몸을 보았다. 나는 평소보다 가볍고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어쩌면 서로 무리를 하고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조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내 몸, 워프레임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실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내부가 드러났지만, 이 강한 팔이 얼마나 잘 싸워왔는지 떠올렸다.
나의 워프레임과 함께라면, 우리는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