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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혼란 속에서, 체념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악몽의 틈을 향해 무기력하게 걸어갔다. 거대한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사고가 정지해버려서인지, 아니면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해서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나는 귀가 멎을 듯이 끊임없이 울리는 굉음을 뒤로한 채 포자 군집을 짓이기며 무언가에 홀리듯 빛 속으로 들어섰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강렬한 빛이 내 얼굴을 덮었고, 이에 따가운 눈을 감고 양팔로 눈 위를 교차해서 막았다. 아픔이 덜해지자, 여전히 왼손만은 이마 앞에 둔 채 눈을 천천히 떴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포자 덩어리의 군체는커녕, 살균실 내부마냥 깨끗할뿐더러 들어오기 전에 비치던 붉은빛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심지어는 비릿한 냄새를 머금고 있던 손, 아니 온몸에 묻어있고 의복에 스며들어 몸을 무겁게 만들던 핏물조차 거짓말같이 자취를 감췄다. 마치 그 모든 상황이 환상이었던 것만 같이…. 그 탓에 무취의 뜻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무런 특별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까 그 상황이 모두 지나치게 몰입한 상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으나,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보는 순간, 다시 그 끔찍한 상상 속으로 빠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곳이었지만, 방안에는 특별한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전력공급에 이상이 있는 모양인지, 넓은 방의 중간부터 끝쪽까지는 이상하게도 상상 속에서의 내 방처럼 칠흑에 뒤덮여있었다. 그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해서 굉장히 꺼림직 했지만, 요전에 오디스가 알려준 대로 관리기기를 수동조작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발을 뻗었다. 그러곤 어둠 속에 발을 내딛는 순간, 차가운 비바람이 나를 향해 매섭게 불어왔다. 분명 복도에 있었을 터인데, 돌연 수십 년은 된 것처럼 본디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폐허 중간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었다. 허름한 벽돌로 세워진 벽 사이에 절반 이상이 날아간 창문들과 천장이라고 부르기 우스울 만큼 널찍하게 뚫린 구멍에서 물줄기처럼 거센 빗방울들이 나를 집어삼키려는 듯 쏟아졌다.

 

날카롭게 쏟아지는 비로부터 얼굴을 가리기 위해 양팔을 눈썹 앞에 가져다 대고, 바닥을 내려다본 채 매서운 돌풍 속으로 힘겹게 발을 옮겼다. 그저 비에 젖어 거울처럼 빛나는 돌 바닥에 비친 아롱거리는 따스한 불빛만을 보고, 앞쪽에 분명 비를 피할 곳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 하나만을 품은 우둔한 행동이 아닌, 갑작스레 장소가 바뀔 때 시선의 끝에는 흐릿하지만 자잘한 불꽃들이 이쪽을 향해 손짓하듯 흔들리고 있던 것을 확실히 보고 내린 행동이었다.

서서히 노을빛으로 물드는 속눈썹을 보고 확연히 광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확신했고, 정확히 숨을 여섯 번 고르고, 발을 크게 두 번 내디뎠을 때, 팔을 찌르는 듯이 내리던 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흠뻑 젖은 채 헝클어진 머리칼이 감기듯 들러붙은 팔을 이마에서 떼고, 오른쪽 손등으로 얼굴에 잔뜩 들러붙은 물방울을 훔쳤다. 비를 피함에 안심하긴 했으나, 굉장히 사나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서 있는 공간은 물웅덩이는커녕 물방울 하나 보이지 않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비가 바람에 불려 사선으로 내려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서 있는 건물 벽에 가려졌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바닥을 치는 빗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굵은 빗줄기는 의구심이 머릿속에 생겨난 직후, 등 뒤로 시선을 옮겼을 때 마주한 마지막 빗방울을 끝으로, 모든 소리가 바람과 함께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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